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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희생’
청파동 교회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만났습니다. 교회는 판자를 두른 아담한 2층짜리 적산가옥이었는데, 교회라기 보다는 가정집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문 총재에게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문 총재는 나에게 다짐을 받듯 말했습니다.“한학자, 앞으로 희생해야지!” “....네!”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희생’이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문 총재가 말하는 희생은 교과서에서 배운 희생과 분명 다를 것이었습니다. 더 높은 의미의 희생, 더 고결한 희생, 더 완전한 희생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을 희생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희생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희생’은 내 마음 속 하나의 화두처럼 각인되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희생’은 평화의 어머니로서 살아가야 할 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97-99쪽)
22.05.31 -
평화의 어머니
오랜 고행 끝에 찾은 뜻길
강원도 춘천에 발령이 난 외삼촌의 기별을 받고 춘천으로 이사한 어머니는 하얀 용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용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품에 안기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만간 큰일이 닥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침 성주교도인 정석천이 보낸 편지를 읽고 곧장 대구로 내려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대구를 떠나려 할 때 또 꿈을 꾸었습니다. 황금용 한 쌍이 서울을 향해 엎드려 있는 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서울로 올라와 한달음에 청파동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꿈에 나타나 하얀 용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때가 1955년 겨울 초입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온갖 고행을 하며 꿈에 그리던 재림주님을 만나 더할 수 없이 감복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90-92쪽)
22.05.04 -
평화의 어머니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간 푸른 섬광
“전쟁이 터졌대요!” “글쎄 북한군이 삼팔선을 밀고 내려왔답니다.”내가 열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와 그나마 생활이 조금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외삼촌은 전시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다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차를 몰고 집으로 왔습니다. 외삼촌은 육군 장교였고 다리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기에 스리쿼더의 경적을 울리며 피란민 사이를 헤치고 겨우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손을 꼬옥 잡고 피란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절한 공포와 혼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외삼촌이 소리쳤습니다.“옆으려요!” “꽝!”한강 인도교를 빠져나와 얼마 못 가 갑자기 뒤에서 ‘꽝’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 푸른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졌습니다. 차를 급히 세우고 우리는 허겁지겁 내려서 길가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얼른 보니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과 같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오던 수많은 사람과 군인, 경찰들이 강물에 빠져 숨졌지만 우리는 다행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불과 몇 미터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으며, 난민 생활을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 이곳저곳을 헤맸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 소녀였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때의 푸른 섬광과 피란민들의 아비규환과 같았던 비명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 옵니다. (평화의 어머니 82-85쪽)
22.04.29 -
평화의 어머니
삼팔선, 이승과 저승의 고빗길을 넘나들며
공산당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자 외할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은 물론 평범한 삶조차 이어가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남한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떨까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보따리 두어 개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안주에서 삼팔선까지 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삼팔선 인근에 다다랐지만 나와 어머니, 외할머니는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북한 인민군에게 덜컥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빈집 헛간에 가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 온 여러 사람이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어른이 보초를 서던 인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인민군에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하니 저들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어느 날 밤 인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면서 우리 세 모녀를 풀어주었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이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남한에서도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는 즐거운 마음에 노래를 몇 소절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 앞의 나무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인민군에게 또 붙잡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덤불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남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려다가 어린아이의 맑은 노랫소리를 듣고 총부리를 거뒀습니다. 그때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받아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듯 애틋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76-80쪽)
22.04.22 -
평화의 어머니
온 우주의 조화로 태어난 우리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탄생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가운데 무의미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 모든 우주만상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 합니다. 온 세계의, 나아가 온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자신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주의 성스러운 작용으로 태어난 귀한 존재임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나는 6천년 만에 이 땅에 왔습니다. 그 노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주의 어머니이자 독생녀의 현현을 간절히 고대해 왔습니다. 누구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누구나 간구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65-66쪽)
22.04.12 -
평화의 어머니
나의 근본 된 아버지이신 하나님
어머니는 기도하듯 힘을 실어 ‘주님의 귀한 따님’이라고 나에게 말씀해 주시곤 했습니다. 이는 외동딸인 나를 향한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딸, 주님의 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외할머니 역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시다” 그래서 ‘아버지’라 하면 육친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마음이 푸근하고 정겨웠습니다. 사춘기를 보내면서도 인생을 놓고 고민한다거나,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다고나, 가난을 탓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근본 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늘 내곁에 함께 계시고 항상 돌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부모였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57쪽)
22.04.05 -
평화의 어머니
달래강 전설
어머니의 고향인 정주에는 달래강 다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튼튼한 다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건너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홍수에 휩쓸리고 모래더미가 밀려와 강바닥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달래강 다리에 바위를 깎아서 세워 놓은 장승 표석이 묻히는 날에는 나라가 없어지고, 드러나는 날에는 조선 땅에 신천지가 펼쳐지리라.중국 사신이 두만강을 건너와 한양으로 가려면 달래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망가져 건널 방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 다리 놓아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조한준 할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 돌다리를 새로 놓았습니다. 네모난 돌을 빈틈없이 쌓아 튼튼하게 올리고 그 밑으로는 배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만들었습니다. 조한준 할아버지는 다리를 새로 만드는 데 전 재산을 다 쓰고 엽전 세 푼을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다리 준공식에 신고 갈 짚신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한준아, 네 공이 크구나, 그래서 너희 가문에 천자를 보내려 했는데 남겨 놓은 엽전 세 푼이 하늘에 걸려 공주를 보내겠노라.”꿈에서 깨어나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달래강에 가보니, 언덕 위에 이제까지 없던 돌미륵불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 미륵이 얼마나 영엄했으면, 누구든지 말을 타고 그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나서야 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별 신기한 일이 다 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그 위에 집을 지어 돌미륵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충정 어린 조한준 가문을 통해 하늘은 신앙심 깊은 조원모 외할머니를 보내셨고, 그리고 그분에게서 신앙심이 더욱 깊은 홍순애 어머니가 탄생했습니다. 한반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늘의 섭리와 정성이 그 옛날 조한준 선조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54-55쪽)
22.03.25 -
평화의 어머니
아버지 한승운 선생
아버지는 그곳 안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청주 한씨 승운 선생은 1909년 1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용흥리 99번지에서 부친 한병건(韓炳健) 선생과 모친 최기병(崔基炳) 여사 사이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습니다. 11세 때인 1919년에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4학년까지만 다니다 중퇴했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열망이 너무 커서 1923년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에 다시 입학해 1925년 졸업했습니다. 그때가 17세였습니다. 졸업 후 선생님이 되어 10년 동안 모교인 육영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광복 직후 혼란기인 1946년까지는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두(교감)로 일하셨습니다.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이 무척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온후한 성품과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품은 치밀하고 알뜰하셨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체력도 뛰어났습니다. 어느 날엔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는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번쩍 들어내셨을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공부도 잘했으며 기독교 신앙이 독실하셨는데, 충직한 교편생활과 신앙생활로 인해 집안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 몸담아 중견 간부로 바쁘게 생활하셨습니다. 악랄한 일본 경찰의 온갖 핍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심정으로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53)
21.10.24 -
평화의 어머니
고향 평안남도 안주의 풍경
1943년 2월 10일, 음력으로는 1월 6일 새벽, 나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안주시 칠성동(七星洞)으로 이름이 바뀐 ‘안주읍 신의리(新義里) 26번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내 고향 마을은 그렇게 깊은 시골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은 듯 따뜻하고 정겨운 동네였습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태어난 집은 마루가 넓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집 뒤로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아늑한 야산이 있었습니다. 철마다 예쁜 꽃들이 때맞춰 피어나고 갖가지 새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습니다. 봄기운이 따사로울 때 집집마다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미소 짓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무리를 이루어 붉게 피어났습니다. 마을 앞으로 작은 개울이 흘렀는데 물이 꽁꽁 어는 한겨울을 빼고는 언제나 졸졸졸 정겨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 물소리를 새소리와 함께 자연의 합창으로 여기며 자랐습니다. 지금도 아득히 떠올리면, 눈시울이 촉촉해질 만큼 포근한 정감을 안겨 주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고향입니다.뒤뜰에는 옥수수를 촘촘히 심은 작은 밭이 있었습니다. 늦여름이면 옥수수가 잘 익어서 껍질이 터지고 길고 가느다란 수염들 사이로 반들반들하고 노란 이들을 드러냈습니다. 햇살 따사로운 오후에 어머니는 알차게 영근 옥수수를 삶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내놓고 이웃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사립문 안으로 들어와 마루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옥수수를 나눠 먹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오후의 허기를 달랬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고, 일제의 착취가 너무 심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자그마한 옥수수 하나를 애써 뜯어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살며시 웃으며 노란 알맹이들을 손수 뜯어 내 입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달콤한 옥수수 알맹이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49-51)
21.10.24 -
평화의 어머니
하늘이 선택한 참다운 선민 한민족
우리 민족은 별자리를 연구해서 하늘의 운세를 풀던 슬기로운 동이(東夷)민족이었습니다. 기원전부터 찬란한 농경문화를 일군 민족으로, 하늘을 숭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선민이었습니다. 한민족인 동이족이 한(韓)씨 왕국을 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조선 이전에 한씨가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신화로 폄하하는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단군신화에는 한민족을 천손민족으로 택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배달민족이기도 합니다. 배달(倍達)은 밝은 나라, 환한 나라, 하늘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을 말합니다.그런데 한민족이 걸어온 5천 년 역사를 헤아려 보면 누군들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민족임에도 끊임없이 외민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한민족은 들풀처럼 짓밟히고, 매서운 추위에 나목(裸木)처럼 헐벗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슬기와 끈기로 외세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나라를 굳건히 지켜 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선한 민족을 그토록 큰 시련과 아픔을 통해 연단하셨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등 중심인물을 세워 섭리를 이끌어 오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2천 년이 흐른 후 하늘은 한민족을 택해 독생자와 독생녀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남성과 유일한 여성을 말합니다. 한반도에서 독생자와 독생녀를 탄생시켜 세계를 구원하고 인류를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민족이 길고 처절한 고난과 고통으로 벌거벗은 나목이 되었을지언정 죽은 고목(枯木)이 되지 않았던 까닭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숭고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은 하늘이 선택한 참다운 선민입니다. (평화의 어머니 p.46-48)
21.10.24 -
평화의 어머니
본관 청주한씨와 이름 풀이
눈을 살포시 감으면 옥수수 밭을 휘감아 나가는 거친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광야를 달리는 수천 마리의 말발굽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소리는 대륙을 힘차게 달렸던 고구려 무사들의 웅혼한 기백과도 같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또 다른 정겨운 소리도 들려옵니다. “소쩍, 소쩍…….” 깊은 산중턱의 높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소쩍새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립니다. 여름밤, 어머니 손을 잡고 잠을 청할 때 들려오던 소쩍새 울음은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 평안남도 안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겨운 소리들은 벌써 70여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꼭 가고 싶은 정든 고향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 땅입니다.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한승운(韓承運) 선생께서는 태몽이라기보다는 몽시(夢示)를 받으셨습니다. 푸른 소나무 숲이 아주 울창한 가운데 맑고 아름다운 햇살이 비치면서 두 마리 학이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을 ‘학자(鶴子)’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청주 한씨이고, 본관은 충청북도 청주입니다. 충청(忠淸)은 ‘마음의 중심이 맑다’는 뜻이며, 청주(淸州)는 ‘맑은 고을’이라는 의미입니다. 강이나 바다의 물이 맑으면 물고기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그 고을에 살던 나의 선조들은 마음이 맑고 겸손했습니다. 청주 한씨의 한(韓)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크다(大)’는 우주만물을 품에 안으며, ‘가득하다(滿)’는 충만함을 뜻합니다. (평화의 어머니 p.46)
21.10.24 -
평화의 어머니
하늘이 특별히 찾아 세운 가문
나의 고향 안주는 본래 애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된 지역입니다. 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서울과 더불어 안주에서도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의 독립만세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나도 함께했습니다. 1919년 외할머니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24년 후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살이 되던 1945년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외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해방된 기쁨에 겨워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에 하늘은 ‘우주의 어머니’ ‘평화의 어머니’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에 뛰어들었던 그 여인, 조원모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절대믿음을 지닌 홍순애 어머니, 그리고 나에 이르기까지 3대 외동으로 이어진 가문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준비해 왔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진 집안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찾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찾아 세운 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녀인 나는 핍박받는 한반도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 100년, 하늘이 예비하신 평화의 어머니 독생녀의 인류구원을 향한 섭리의 발자취는 온 지구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19)
21.10.24